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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하는 디자이너 Review/책

100. 이기적 유전자.


그 유명한 '만들어진 신'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 할아부지의 책이다. 뭔가 낯익은 제목이라 읽어보자 하고 냅다 빌려서는 3일을 내리달려 읽었다.

꽤 방대한 분량에 걸쳐 참 여러 가지 잡다한 내용을 주절주절 설명하고 있지만 이 한없이 어리석은 중생은 이것만 알겠어유. 우리는 유전자에 의해 이용되는 생존 기계일 뿐이다. 모든 동물이 마찬가지다. 종의 이익이라는 논리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뭐 이런 내용을 설명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겠다.

재미있는 책이다. 원래 과학과는 거리를 두고 살았던 터라 읽는 동안 용 많이 썼지만 그래도 끝장을 봤다. 사람이, 아니 유전자가, 이기적인 본성에 기초를 두고 먼 옛날 원시 수프서부터 바로 지금 현재까지 생존해 왔다는 것은 꽤 타당한 논리다. 그러나 뭐라고 해야 하나, 내가 이 책에 대해 반감이 드는 것은 리처드 도킨스가 너무나 확고하게 자기의 논리에 일종의 자만심 같은 것을 보이면서 기존의 이론들을 다 깔아뭉개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인 듯 하다.

일단 내가 이 책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내가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에 대해 내 나름대로 정리를 해봐야겠다. 내 안에서 가장 논쟁이 되었던 부분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였다. 할아부지는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에 걸쳐 참 무섭도록 일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는데 그것은 생물체의 이타적인 행동이 종의 이익을 위해 수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버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미가 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행동이나 새가 다른 새를 위해 경계음을 내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가젤 영양같은 것들이 포식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높이 풀쩍 뛰어 달아나는 것은? 철저하게 유전자 이기주의 측면에서 보자면 새끼는 어미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고 새는 자신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은 그룹을 위해 경계음을 내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라고 한다. 좀 어이없었던 것은 가젤 영양이 높이 뛰는 이유는 자신이 높이 뛸 수 있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이라나? 글쎄다. 그건 잘 모를 일이다. 결정적으로 내 안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리처드 도킨스가 그토록 저주하는 '종의 이익' 측면을 뒤엎으려고 할 때 문제를 정면돌파하지 않고 자꾸 측면으로 끼어들어 교묘하게 피해가려고 하는 것이다. 일단 '종'의 이익을 설명하려고 할 때 그 범주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한다. 사람? 아니면 포유류? 척추동물? 생명체? 어디까지 종을 설정해야 하냐며 어물쩡 넘어가 버리는 글의 태도가 맘에 안 드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고 재정립하고 확고히 만드는 데 종이를 다 써 버렸다.

또 맘에 안 드는 것은 자꾸 뭔가 정의를 다시 생각하고 다시 되뇌이고 또다시 얘기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로 그렇게 당연한 얘기라면 자꾸 다른 곳으로 달아나려고 하는 생각을 억지로 정립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종의 이익을 당연시 여기는 행위는 철저하게 잘못된 것이라고 책 전반에 걸쳐 설명하고 있으나 왜인지 책을 쓰는 저자 자체도 종의 이익에 휩쓸려 자꾸만 헛갈리고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정말 확실시된 이론인지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태초에 형태가 없는 유전자 덩어리들만이 둥둥 떠다니고 있는 세상을 원시 수프라 정의하며 열심히 가설을 세우고 있는 것은 알겠으나 사실이 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때 우리는 있지 않았으니까. 물론 나보다도 당연히 이 쪽 분야에 조예가 깊어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길이 많겠지만 어쨌든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그런 주제에 너무나 깊은 확신을 내리는 것은 일종의 독단이 아닌가?

결론은 썩 맘에 들지 않는 책이지만 그래도 맘에 드는 구절은 있었다.
 
'자기 복제자는 기나긴 길을 지나 여기까지 걸어 왔다. 이제 그것은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며, 우리는 그것들의 생존 기계이다.'

아무래도 이러한 가설에 입각하여 글을 쓰다 보니 한쪽으로 치우친 감이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겠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의식에 의지하여 행동하지 않고 오로지 우리 몸 속의 유전자가 지시하는 대로 행동하는 기계라는 가설은 내 맘을 매료시켰다. 

이러쿵저러쿵 불만은 참 많았지만 그래도 읽고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누구든 이 책을 읽고 이 리뷰도 읽어 주고, 나와 가볍게(진지하게는 말고. 왜냐면 내가 밑천이 딸린다)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