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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하는 디자이너 Review/책

반짝반짝 빛나는 : 피해자들의 이야기.


※ 글에 소설의 결말이 언급됩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에쿠리 가오리



굉장히 오랜만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 딱히 보고 싶은 책은 없었지만 (보고 싶었을 책들은 죄다 예약서가에 비치되었을 것이었다.) 그래도 뭔가 봐야겠다는 생각에 일본 소설을 집어 들었다.

에쿠니 가오리는 아마 '냉정과 열정 사이' 중 rose 편을 썼다. 여자들은 blue 보다는 rose를 더 좋아한다던데 나는 사실 blue가 더 좋았다. rose가 여자의 복잡한 감정을 끄적였다면 blue는 남자의 심정 묘사와 더불어 과거와 현재의 상황 설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무작정 사랑이 어떻네, 가슴이 아리네 등의 말을 지껄이는 것은 딱 질색이라 blue가 더 맘에 들지 않았나 싶다.

반짝반짝 빛나는, 도 그렇다. 일단 책 속의 설정 자체가 복잡하기 때문에 감정선 또한 명쾌하게 집어내기가 어렵다. 알코올에 중독된 여자와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합의 하에 결혼했다. 남자는 섹스할 때 콜라냄새가 나는, 오래된 애인이 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를 쓸 수가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만, 하, 참 답도 없다. 쇼코는 제 무덤을 팠다.

쇼코가 무츠키에게 곤의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는 것은 마치, 여자가 남자친구에게 전 여자친구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것과 비슷하다. 궁금하겠지. 하지만 듣고 난 후 결국 남는 것은 출처를 알 수 없는 허탈함과 전 여자친구에 대한 막연한 분노일 것이다. 쇼코 또한 극심한 울鬱 상태에 빠진다. 바보같은 짓이다. 그러게 왜 자신을 죽이는 짓을 하는 거야?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고.

그런데 더 재밌는 건, 쇼코는 무츠키가 곤과 헤어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 오히려 집에 곤과 무츠키, 그의 친구들을 초대해 즐겁게 먹고 마신다. 무츠키가 행복하는 것이 쇼코의 행복인 것일까..................잘 모르겠다.



이토록 아슬아슬한 관계인데 책은 모든 상황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쇼코가 극도로 흥분하여 광폭한 상태로 변할 때마저 문체는 평화롭다. 예를 들면,


"쇼코,"
이번에는 쇼코가 설명할 차례야, 라고 미즈호가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너네 뭐가 잘 안 돼가는 거야?"
나는 이미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목구멍은 뜨겁고, 커다란 소리르 내며 엉엉 울고 있었다. 원숭이처럼 얼굴도 벌개졌을 것이다. 주위 사람들이 힐끔힐끔 보고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런 눈길 따위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오늘 아침에 휴대폰이 울린 것도 미리 계획된 일이었던 것이다. 무츠키의 식욕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랐는데, 환자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까지 일었는데. ... 나는 쭈그리고 앉아 왕왕 울었다.


이런 식이다. 상당히 묘한, 느낌이다. 나는 이런 모순적인 느낌을 좋아한다.



...쇼코가 이런 자신의 감정을 잘 극복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는 셋이 평화로이 둥글어지기를 바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인공수정에 대해 상담했을 때 무츠키와 곤의 정자를 섞어 셋 모두의 아이를 생각하는 것이나, 무츠키에게 결혼기념일 선물로 곤을 짜잔, 하고 내미는 것을 보아하니.
 
소설은 아름답게 해피엔딩이지만, 쇼코가 울 상태에서 곤을 그어 버린다거나, 곤이 자살한다거나 (혹은 쇼코가) 비극적인 끝이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에쿠니 가오리는 애정으로 복잡한 관계의 평화로움, 뭐 이런 걸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제목만 봐도 그렇다. 그렇지만 이들을 아름답게 볼 수 없는 건, 셋이 평등한 사랑을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무츠키와 곤은 서로 사랑하고 그 사이에서 만족감을 얻지만 쇼코는 사랑을 주기만 한다. 이것은 불공평하다.

호모를 사랑하게 된 쇼코나, 둘 사이에 끼어 버린 무츠키나, 애인을 사회 제도에 묶이도록 둘 수 밖에 없는 곤이나. 다들 끔찍한 피해자일 뿐이다. 가해자는 본인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