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보관상자@ Archieve/생각

서늘한 밤 을지로.

 

 

 

캐나다로 이주한 지 10년이 됐어도,

잊혀지지 않는 감각이 있다. 눈을 감으면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는 듯 하다.

 

2012년 겨울, 아직은 어색하게 느껴지던 검은 정장치마와 구두를 신고 종종거리며 저녁의 을지로를 걷던 날들. 밤을 잊은 높은 건물들이 아직 불을 밝히고 서 있는 것을 올려다 보며 '나도 언젠가는 저 곳에 출입증을 갖고 들어갈 수 있을까? 들어갈 수 있겠지?' 막연히 생각하며 삭막한 빌딩숲을 익숙한 곳인 마냥 헤치고 걷는다. 어느 순간 두려워지지만, 나라는 인간은 절대 못 이룰 것 같은 명제이지만, 그래도, 다른 이들이 했으니 나도 할 수 있을 거라 굳게 마음 먹으며 어느 새 어깨 밑으로 흘러 내린 무거운 가방끈을 추스른다. 나는 좋은 대학을 졸업했고, 대외활동을 열심히 했으며, 좋은 곳에서 대학생 하계 인턴을 마무리 지었으니까. 난 할 수 있을 것이다. 코 끝을 스치는 바람이 서늘했다.

 

 

 

 

어떤 날은 2014년 연말의 종로 골목이다. 역시나 어둡고 춥다. 바깥은 아직 소란스럽다. 술을 꽤 마셨는지 불콰해진 얼굴인 사람들이 흥에 겨워 얘기하는 소리가 공간을 채운다. 나는 썰렁한 스타벅스 구석에 앉아 토익책을 펼쳐 놓고 있다. 또는 인적성 책. 몇 번의 인적성, 그리고 그보다 약간 적은 숫자의 면접. 그마저도 실패했다. 대체 언제쯤이면 나는 집에 합격 꽃바구니를 배달 받게 될까. 스타벅스 안은 대부분이 직장인들이다. 나는 마치 저들과 같은 백로인 양 하얀 가루를 뒤집어 쓰고 태연스레 눈을 꿈뻑거리는 한 마리 가마우지 같이만 느껴진다. 아니, 그러면 뭐 어떠하랴. 두고 봐라, 나도 조만간 저들처럼 하얀 털이 돋아날 테니. 그리하여 저 높디높은 빌딩 숲 안으로 당당하게 들어갈 테니. 2024년의 내가 말하건대, 애석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올해 한국에 들어가면 이상하게 을지로에 다시 가고 싶다. 가마우지도 백로도 아닌, 아비새의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