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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안 사요'의 미학. feat. 있는 걸 씁시다


당신의 공간은 곧 당신의 인생.

 

어려서부터 우리 집엔 '뭔가' 많았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하긴 어렵고, 그렇다고 무가치한 물건들은 아니었고. 어쨌든 생활에 다들 필요한 친구들이었다. 자주 쓰진 않지만 그렇다고 막상 필요할 때 없으면 아쉬운, 그런 애들. 

 

거실 TV 콘솔을 열으면 서랍마다 '무엇들'이 가득 있었고, 몇 번 버리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 때마다 세대주의 큰 반대가 있었다. 그것들이 쓰여지는 것을 딱히 본 적은 없는 것 같지만 뭔가 자꾸 새끼를 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차피 내 집도 아닌데 뭘. 대신 나는 점점 내 인생을 내 방에 가두기 시작했다. 내 방 밖은 이미 텅 빈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7평 남짓한 공간에 26년의 나를 담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내 삶에 며칠 되지 않는, 유난히 잠이 오지 않는 밤이 닥치면 나는 내 방에 들어찬 내 인생을 어떻게 하면 내다 버릴 수 있을까 골몰했다.

 

27살이 되기 3일 전, 나는 캐나다로 이사했다. 러기지 2개에 내 인생을 꾹꾹 눌러담을 수 있었다. 이렇게 쉽다고? 대신 리빙박스 6개와 큰 책장 하나가 한국에 남긴 했지만. 그로부터 5년 뒤 내 인생은 다시 방 한 칸으로, 다시 원베드룸 스위트로, 지금은 방 5개의 타운하우스가 돼 버렸다. 공간이 넓어질 때마다 내 동거인이 가졌던 고민은 '어떻게 이걸 채울까' 였다. 내가 아님. 그는 거실에 쇼파와 TV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쇼파(싼 거)를 샀고 TV를 위한 스탠드(중고)를 샀다. 방 5개를 가진 집주인이 됐을 땐 나는 정말 맛탱이가 갔다. 침대를 5개를 샀다. 그건 좋다. 없는 걸 사는 거였으니까. 주방에 빈 공간이 많았고 그것들은 곧 갖가지 모양의 락앤락 통들, 통들, 병, 그리고 또 '무엇들'로 가득 찼다. 그것도 좋다. 원래 주방은 그런 거니까. 마지막 방의 침대 프레임을 샀다(또?) 6개의 서랍이 달린, 아주 멋진 프레임이다. 며칠이 지나니 그게 또 가득 차기 시작한다. 음.. 이건 아닌데..

 

 


 

 


진열장의 낯선 그 물건은 당신의 욕구불만을 충족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배가할 뿐.

 

내가 어렸을 적 우리 집 거실 TV콘솔 서랍엔 치약, 로션, 샴푸 등 잡다한 생활용품이 있었다. 명절 선물로 곧잘 들어오곤 하는, 하지만 각자의 취향에 맞지 않아 결국 서랍에 들어가고 잊혀진, '물건들'. 나는 그런 것들을 발굴해서 써 버리는 게 좋았다.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날잡고 서랍을 뒤집어 엎었고 온갖 화장품 샘플들을 털어서 캐나다로 가져간 뒤 결국 다 썼다. 돈을 들여 새 것을 살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좋았고, 한국 집에 빈 공간을 만들 수 있었기에 더욱 좋았다. 마지막으로 기초용품을 산 게 언젠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친구들이 가끔 날 위해 본인에게 필요하지 않은 뭔가를 가져 오는 경우가 있다. 과일, 화장품, 가끔은 옷 등등. 나는 그게 너무 좋다. 누군가의 공간에 들어앉아서 돌덩이같은 부담감만 주다가 버려지는 것보다는 나에게 와서 쓰여지는 게 모두에게 해피엔딩인 것이다. 

 

누군가에게 받았거나 내가 받았던 화장품 본품/샘플들. 대충만 모았는데도 이만큼이다.

 

쇼핑을 나갈 때의 나는 굉장히 명확한 '특정의 물건'을 필요로 한다. 옷으로 따지면 '네이비 스트라이프 민소매 여름 원피스'(결국 못 찾았다), 'Coffee 그리고 Tea라고 쓰여진, 특정한 높이 이상을 충족하는 Canister set'(이것도 결국 못 찾았다) 등등. 그래서 나의 쇼핑은 곧 좌절감과 일치한다. 아무 것도 못 사고 돌아오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 하지만 장기적인 입장에서 보면 큰 만족과 행복이다. 나는 내가 100% 원하지 않는 물건을 위해 돈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공간과 돈 둘 다 아낀 것이다. 가끔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멋진 물건 앞에서 30분 이상을 서성거리며 고민하지만 결국, 나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것이 내 인생을 구원하러 오는 게 아님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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