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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하는 디자이너 Review/책

소설 야시夜市 : 어디엔가는 꼭 존재할 것만 같은.

 

스포일러를 조심하세요.

 

 

 

 

쓰네카와 고타로.

 

 

 

해리포터 시리즈를 좋아했다. 그리고 좋아하고 있다. 비록 배경은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곳 영국이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킹스크로스 역을 갈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곳에서 9와 3/4 승강장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마치 진짜로 호그와트에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실재감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금 존재하고 있는 머글 세계와 그들이 존재하는 마법사 세계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원한다면 정말로 그 곳으로 갈 수도 있다는 생경한 기분은 참으로 유쾌해지는 것이었다.

 

 

*

 

 

 

1. 분명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쓰네카와 고타로의 '야시'와 '바람의 도시' 또한 책장을 연 순간 그토록 빠져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바람의 도시'의 고도와 '야시'의 야시 또한 분명 누구나 갈 수 있는 장소는 아니다. 특별한 곳,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원한다면 누구라도 그 곳에 갈 수 있다.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그것은 분명히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다, 는 점이 나의 마음을 잡아끌었다.

 

 

2.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

 

'바람의 도시'와 '야시'는 공통점이 많다. 쓰네카와 고타로가 창조한 저 쪽의 세계 고도와 야시 모두 우연히 흘러 들어왔지만 그 곳에서 빠져나가기란 여간 쉽지 않다. 고도에서 바깥 세상을 나가는 길은 자꾸만 폐쇄되고, 야시에서 빠져나가려면 반드시 무엇인가를 사야만 한다. 그러나 야시에서 파는 물건은 지나치게 비싸다. 사실 필요도 없는 물건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대체로 곤경에 빠진다. 자, 그럼 어떡하지.

 

 

3. 탈출의 대가는 크다.

 

두 소설의 결말에서 공통점은 결국 희생자가 나온다는 것이다. '바람의 도시'에서는 가즈키가 죽었고 '야시'에서는 유지가 야시의 소유물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 대가로 '바람의 도시' 주인공과 '야시'의 이즈미가 탈출하게 된다.

 

 

 

4. 주요 인물은 항상 이야기의 실마리와 복선을 가지고 있다.

 

'바람의 도시'의 렌과 '야시'의 노신사는 결국 그 이야기를 끌어가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렌은 가즈키를 죽인 고모리와 대단한 인연 관계였고, 노신사는 유지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 쓰네카와 고타로는 고도와 야시를 통해 공간적 배경을 뒤트는 동시에 시간적 배경 또한 함께 헝클어 버렸다. 그리고 그 두 개를 절묘하고 치밀하게 연결했다. 그 위로 아름답게 수놓아진 플롯은 내가 예상했던 클리셰들을 처참하게 깨부수었다.

 

 

 

5. 주인공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들은 저 쪽의 세상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더 이상 그 곳을 기억하지 않았다. 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기억하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또는 잊어버렸다. 야시의 규칙대로, 또는 야시의 상인이 만든 규칙대로 이즈미는 유지에 대해 전부 잊어버렸다.

 

 

 

 

6. 그러나 여지는 있다.

 

그들은 잊었지만, 또는 잊고 싶어했지만, 어딘가에 고도는 존재하고, 또한 야시는 언젠가 반드시 열린다, 라는 문장으로 소설은 끝난다. 지금으로 일련의 사건은 종료되었지만 제2의 주인공, 이즈미가 생길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나일 수도 있는 것이다.

 

 

*

 

문장이 술술 잘 읽혔다. 심심한데 뭐라도 읽어야겠다, 라는 생각으로 집어든 책을 앉은 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호로록 다 읽어 버렸다. '바람의 도시'의 주인공이 고도의 길을 헤맸던 것처럼, 유지, 그리고 이즈미가 야시의 상인들 사이를 헤치고 다녔던 것처럼 나 또한 쓰네카와 고타로가 창조한 저 쪽의 세상에서 족히 두 세 시간을 허우적거렸다.

 

 

혹시 또 모를 일이다. 어느 날 마치 거짓말처럼, 벚꽃이 흩날리는 봄날에 공원 안에서 길잃은 나에게 누군가 고도로 들어가는 길을 안내하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