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만 교수님은 모던/포스트모던 문화읽기 수업에서 좋은 주제의 서적들을 많이 추천해 주셨다. 그것은 모던/포스트모던 문화의 큰 틀 안에서 다양한 주제들을 담고 있었다. 예를 들면 소외된 인간이라든지, 각박한 소비사회라든지, 때로는 종교적인 주제와도 연결되어 있는 적이 많아 그 동안 힘을 잃고 죽어가던 나의 지적 호기심을 주기적으로 되살려 주었다. 
한 번은 교수님께서 직접 서적을 들고 와서 표지를 보여 주시면서, 그리고 사이버 캠퍼스의 공지사항에 서적의 이름과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서점까지 손수 알려 주시면서 꼭 읽어 보라 하셨다. 그것이 바로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었는데, 나는 그 제목에 묘하게 끌렸다. 교수님이 공지사항에 책을 추천하는 글을 쓰시면서 영화 한 편, 커피 두 잔 마시지 않고 책을 사서 보라고 하셨기 때문에 더 끌렸다. 언제부턴가 보고 싶은 책이 있더라도 웬만하면 사지 않고 일주일, 한 달을 기다리는 한이 있더라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보는 '좋지 않은 습관'이 생겨 스스로를 탓하던 때에, 커피 두 잔만 마시지 않으면 오래도록 다시 볼 수 있는 책을 가질 수 있다는 교수님의 글이 나의 마음 속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래서 교수님의 글에 답글로 좋은 책을 추천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남기기도 했고, 교수님이 알려 주신 서점으로 가서 책을 들추어 보기까지 했는데도 결국 '자기만의 방'을 구매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사실 모르겠다. 정말로 커피 두 잔만 마시지 않으면 충분히 살 수 있었는데 왜 그 때 사지 않았을까? 아직 서적을 구매하는 것이 낯설다, 그 때 나는 시험, 과제 제출만으로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벅차다, 라는 변명은 정말 변명뿐일 테니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쨌든 '자기만의 방'은 내 기억 속에서 스물스물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러던 차에 기말고사를 치르고 난 후 프리미엄 레포트를 받아 주신다는 교수님의 말씀에 '자기만의 방'이 퍼뜩 떠오르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글을 읽어 보라고 주신 기회다 싶어 재빨리 책을 구매하고,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앉은 자리에서 정신없이 책을 읽어 내렸다.

사실 나는 서적이나 영화를 보기 전에 사전 정보를 찾아 보기를 꺼리는 편이다. 제목만 보고 대강의 내용을 예상하는 재미와, 그 어떤 배경 지식도 가지지 않은 상태로 책을 읽어 내리면서 깨닫는 주제와 감정을 즐기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작가는.. 들어는 보았는데 (부끄럽지만) 이 작가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오로지 '자기만의 방'이라는 단어만 보고는, 처음에 외부와 단절된 상태로 자기만의 세계에 콕 틀어박힌 어떠한 사람을 뜻하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은 곧 '김지현의 방'이기도 했다.

이 책은 글쓴이가 독자에게 조곤조곤 무엇인가를 말하는 대화체로 진행된다. 글쓴이는 여성과 픽션에 대해 이야기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에 대해 고민하다가 역시 책 속에서 드러난 여성을 조사해 보아야겠다는 생각하고 세상의 모든 책이 다 모여 있는 대영박물관의 서가에 들어가게 된다. 

우선 글쓴이는 남성이 여성에 대해 쓴 글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그리고 그들이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X 교수는 여성이 남성과 비교했을 때 정신적, 윤리적, 육체적으로 열등하다고 역설한다. 글쓴이는 그 안에서 남성이 여성에 대한 일종의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하다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들의 우월성을 비추어 줄 '거울'이 사라진다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두려움이 곧 분노라는 감정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생각이 모두 진리고 빛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만약 그녀의 생각이 사실이라고 가정해 보았을 때, 나는 '자기만의 방'이 쓰여지는 토대가 된 강연이 열린 1928년과, 그로부터 약 90년이 지난 2012년의 남성이 전혀 변하지 않은 채 분노의 감정을 여전히 표출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놀랍고 한편으로는 안타깝게 다가왔다.
만약 포탈 사이트에 남성과 여성의 대결구도가 주제인 기사라도 올라오는 날에는 그 기사의 댓글 페이지는 마치 폭탄이라도 맞은 전쟁터처럼 변해 버리고 만다. 절대다수의 남성 익명 유저들이 그 곳에 써 놓은 댓글들은 얼굴을 마주보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심각한 수준의 여성비하 내용으로 가득했다. 그 내용을 뒷받침하는 타당한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욱 안타깝다. 그 페이지에 글을 쓰는 남성들은 이유가 명확치 않은 맹렬한 분노로 여성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쏜다. 사실은 나 또한 여성의 집단이 이유없는 공격을 받는 것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다. 내가 재학 중인 이화여자대학교가 바로 그렇다.
지금은 내가 바로 그 집단에 속해 있지만, 입학하기 전 복수합격한 여러 대학 중 최종적으로 어느 대학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해 인터넷 상담 공간에 자문을 구한 적이 있다. 댓글의 반응은 충격적일 정도로 이화여대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 때에 나는 이미 이화여자대학교를 입학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왜 사람들의 반응이 이럴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에게 의견을 주었던 사람들 중 특히 부정적이었던 사람에게 직접 개인적으로 연락하여 왜 그런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돌아온 답변은 실망스러웠다. 그는 자신이 이화여대를 비난한 것에 대해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이대가 좋은 학교니 잘 다니라고까지 하였다. 굉장히 묘한 기분이었다. 모두가 볼 수 있는 공개된 장소에서는 일관적으로 비난하던 사람이 객관적인 근거를 따져 물으니 금세 수그러드는 모습은 나에게 낯선 모습이었다. 

글쓴이는 그 시기의 책을 통해 남성이 여성에 대해 맹목적으로 비난하는 모습을 보고, 여성은 남성에 비해 금전적으로 가난했던 모습을 보면서, 그러나 1백 년 뒤 여성은 보호받는 존재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필연적으로 여성은 한 때 여성을 거부하던 모든 활동과 직무에서 제 몫을 담당하게 될 거라고 이야기했다. 아직 1백 년이 지나지 않았으니 남성과 여성의 모습이 그다지 변하지 않은 것도 사실 당연한 이야기인가?

남성이 왕성한 경제활동을 하며 부를 쌓고 금전적으로 부유해질 때, 여성은 집에서 바느질과 집안일을 하면서 경제적인 면에서 남성에게 종속적이었다. 또한 열다섯, 열일곱 사이엔 좋든 싫든 무조건 결혼해야 했다. 글쓴이는 과거 여성 작가의 문학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이런 상황에서 당시의 여성이 어느 날 갑자기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같은 작품을 쓰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라 역설한다. 
또한 글쓴이는 셰익스피어의 동생 주디스라는 가상인물을 설정하고 그녀가 어떤 생활을 했을 것인지 그 시기의 여성의 상황을 통해 유추해 보는데, 주디스는 집안의 든든한 지원을 받는 오빠와는 대조적으로 홀로 자신의 열정을 표현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그 시기의 여성에게는 본인에게 글쓰기에 대한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마음놓고 표현할 주변환경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어려움이 더없이 컸으리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19세기 초까지도 조용하고 바깥 소리가 들리지 않는 방은커녕,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것조차 부모님이 특별히 부유하거나 신분높은 귀족이 아니라면 어림없는 일이었다고 글쓴이는 말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는 '자기만의 방'은 여성이 주변환경에 종속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개인적인 공간을 대표하는 단어임을 알 수 있었다. 뒤이어 글쓴이는 여성작가의 좋은 사례로 제인 오스틴을 언급하며 그녀가 자신을 억압하는 환경 속에서도 자신을 잘 다스려 그 시기의 제인 오스틴이 처했던 불행한 환경이 문학 속에는 전혀 개입되지 않고 오로지 제인 오스틴의 마음만이 존재하는 '오만과 편견'이 나온 것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 밖에도 그녀는 여성은 과거부터 이미 존재했던 남성의 문장이 아닌, 이제부터 새로 만들어지는 여성의 문장으로 글을 써야 한다고 하고, 여성의 심리는 여성이 심도있게 연구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쯤 보면 글쓴이, 곧 버지니아 울프는 남성에 대항하여 여권신장을 주장하는 극단적 페미니스트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녀는 책의 말미에 택시에 오르는 남녀 한 쌍을 보며 들었던 감정을 언급하며 남성과 여성을 양분하는 것이 아닌 하나로 융합하여 생각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성을  별개의 태도로 인식하는, 성숙한 마음에 이르기 어려운 시절이니 여성들은 끈기를 가지고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자기만의 방'은 끝을 맺는다. 그러니 버지니아 울프는 페미니스트라기보다는 사실 인도주의자에 가깝다.

아까 초반에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은 곧 '김지현의 방'이라는 단어로 치환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여성들은 자신이 온전히 들어간 문학작품을 창조하기 위해 '자기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인데, 나 또한 여성이고 창조적인 작업이 주로 이루어지는 디자인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이니 '자기만의 방'을 가지는 것은 더더욱 타당해진다. 그래서 나는 '김지현의 방'을 가지고 있는가, 하고 자문해 보았다. 그에 대한 답은 그렇다,였다

주변 환경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물리적인 '김지현의 방'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부모님께서는 감사하게도 성인이 된 딸이 개인적인 공간을 가질 수 있도록 방을 주셨다. 내가 원한다면 나는 방문을 닫을 수도 있고 심지어 잠궈 버릴 수도 있다. 일단 내 방 안으로 들어가기만 한다면 나는 내 주변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다. 금전적인 면에서는 어떠한고 하니, 마찬가지로 부모님께서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 주시고 나 또한 개인적으로 필요하다면 일을 해서 금전적인 독립을 이룰 수 있는 상황이다. 
한편 정신적인 면에서 남성에게 완전히 독립되어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러나 약 80%정도는 역시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여대에 재학하고 있기 때문에 남성 디자인학도를 만난 지가 꽤 오래되었다. 당연히 남성이 어떤 식으로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지 잘 알지 못하고 또한 남성이 내 작품을 보고 평가하는 일도 드물기 때문에 내가 '김지현의 방' 안에서 행하는 작업은 온전히 김지현이라는 여성으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버지니아 울프의 관점에서 바라 보았을 때, '김지현의 방'은 완전히 옳은 방식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바란 것은 남성에 대항하는 여성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두 성이 하나로 융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융합의 단계를 이루지 못하였다. 사실 나는 융합의 단계를 논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남성과 여성이 편을 갈라 누가 더 우등한지, 열등한지 다투는 것 그 자체가 소모적인 논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이 다를 뿐 같은 염색체를 지닌 인간인데. 여성이 자기 방을 가지는 이런 단계 없이, 그냥 곧바로 양성이 하나가 되는 경지에 다다르고 싶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행복할까. 인터넷 기사의 댓글 창에서조차 전쟁이 일어나는 상황은 이제 그만 보았으면 싶다.







2012년 6월 24일의 내가 썼던 글. 진짜 오랜만에 아이패드 메모장을 뒤지다가 발견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2018년의 나는 2012의 나에게 부끄럽다. 저 때의 나는 혼자 이런저런 생각도 많이 하고 글도 열심히 썼는데.. 지금의 나는 사는 대로만 생각하는 애가 됐다. 빨리 다시 학구적인 내가 되고 싶다.





Posted by ruasssj ruasss 트랙백 0 : 댓글 0